총격도 백인도 사라졌다… 21세기 서부극
백인들만의 장르, 서부극도 옛말
서부극은 총격이 난무하는 백인들만의 장르라는 것도 옛말. 21세기에는 서부극도 변신한다. 흑인들이 주인공을 독차지하고, 총성 한 번 듣기 힘든가 하면, 갈등보다는 유려한 자연 풍광이 돋보이는 서부극까지. 21세기의 달라진 서부극들이 올 가을 극장과 안방을 찾아왔다.
◇백인 없는 서부극: 더 하더 데이 폴
본래 서부극은 19세기 미(美)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백인 무법자와 보안관의 혈투를 묘사한 장르. 하지만 지난달 극장 개봉 이후 넷플릭스를 통해서 상영 중인 ‘더 하더 데이 폴(The harder they fall)’에서는 좀처럼 백인들을 찾기 힘들다. 기껏해야 열차 기관사와 승객, 은행 직원 같은 단역들이 전부다.
이전에도 백인 중심의 서부극에 대한 반성은 존재했다. 백인들의 요새를 떠나 인디언의 편에 서는 ‘늑대와 춤을’부터 과감하게 흑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복수의 칼을 가는 냇 러브(조너선 메이저스)부터 황금 권총을 든 악당 루퍼스 벅(이드리스 엘바)까지 흑인들만의 서부극에 가깝다. 음악마저 고색창연한 주제가 대신에 제이지의 흑인 힙합으로 바뀌었다.
초반부터 피가 튀고 살이 떨어져 나가는 자극적 장면과 과장된 연출에선 타란티노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선 흑인 서부극 버전의 ‘킬 빌(Kill Bill)’에 가깝다.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후반부 설정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갈수록 인종과 장르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하이브리드 시대의 영화 트렌드를 엿볼 수 있다.
◇총격 없는 서부극: 퍼스트 카우
최근 극장 개봉한 ‘퍼스트 카우’(감독 켈리 라이카트) 역시 서부 개척 시대가 배경. 하지만 후반부에 잠시 등장하는 추격 장면 외에는 총성 한 번 울리지 않는다. 대신에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건 냉대와 멸시에 시달렸던 유대인과 중국계 이민자의 환대와 우정이다. 그래서 첫 장면에서도 ‘새는 둥지, 거미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격언을 인용한다. 지난해 뉴욕 비평가 협회상 작품상 수상작. 영화 ‘미나리’를 배급했던 미 영화사 A24의 작품이다.
사냥꾼들의 취사를 담당하는 유대인 쿠키(존 마가로)와 사업 수완이 빼어난 중국계 이민자 킹 루(오리온 리)가 주인공. 이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빵과 비스킷이 시장에서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하지만 이들에겐 영업 비밀이 있다. 한밤에 이웃집 젖소의 우유를 몰래 짜서 빵을 굽는 것. 들통나는 날이면 장사는 물론,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판이다. 초반부의 지극히 느린 템포 때문에 발동이 서서히 걸리지만, 주변인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어 시종 애틋함을 잃지 않는다.
◇갈등이 모호한 서부극: 파워 오브 도그
17일 개봉하는 영화 ‘파워 오브 도그’(감독 제인 캠피언)는 올해 베네치아 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 수상작. 하지만 이 영화에서 뚜렷한 갈등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언뜻 ‘에덴의 동쪽’을 닮은 초반부에서는 형제 갈등인 듯하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닮은 중반부에서는 두 남성의 미묘한 관계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파국의 원인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영화 ‘피아노’로 1993년 칸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뉴질랜드 여성 감독 캠피언이 연출을 맡았다. 미 서부가 영화의 배경이지만, 감독의 고국인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서부극의 주인공은 광활한 자연이며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캠피언은 유려한 자연 풍광을 영화에 녹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