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한국 콘텐츠, 위상의 무게
하재근 문화평론가
- 입력 2021-06-25 | 발행일 2021-06-25 제22면 | 수정 2021-06-25 07:12
"×매너" 등 印尼 비하 논란
같은 일 반복땐 한국에 반감
수출·관광 산업에도 악영향
위상 걸맞은 의식제고 필요
문화평론가 |
최근 SBS 드라마 '라켓소년단'의 인도네시아 시청자들이 공분했다고 한다. 극중에서 우리 배드민턴 주니어 국가대표팀이 인도네시아 국제대회에 참가한 대목이 문제였다. 숙소 시설이 안 좋았는데 이것이 현지인들의 비신사적 행위인 것처럼 묘사됐다. 우리 코치진은 이와 관련해 "숙소 컨디션이 엉망이다. 자기들은 본 경기장에서 연습하고 우리는 에어컨도 안 나오는 다 낡아빠진 경기장에서 연습하라고 한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이기고 싶은 것"이라는 대화를 나눴다.
주인공의 실수에 인도네시아 관중이 환호하자 우리 코치진은 "공격 실패할 때 환호는 X매너 아니냐" "매너가 있으면 야유를 하겠냐"는 대화까지 나눴다. 순간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선을 넘은 표현이었다. 다른 나라 국민들을 싸잡아 "X매너"에, 매너를 따질 수준조차 못 되는 아예 무개념한 사람들로 묘사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시청자들이 공분하는 게 당연하다. 이에 '라켓소년단' 제작진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의 댓글을 통해 사과했지만, 댓글사과 정도론 여론이 가라앉지 않아서 아직까지 항의성 댓글과 보이콧 선언이 이어진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우리 드라마는 우리만 보는 상품이 아니다. 동아시아 전역이 함께 보는 국제콘텐츠라고 봐야 한다. 그 정도로 K콘텐츠의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에 넷플릭스 같은 해외 동영상 플랫폼이 한국 드라마 판권에 거액을 지불한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서구권에서의 성장이 한계에 부닥친 넷플릭스에 사활을 건 전략지역이다. 그 지역에서 한국 드라마가 최고 인기이기 때문에 넷플릭스는 올해에만 한국 콘텐츠 확보에 5천600억원가량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이런 자금이 우리 콘텐츠 산업계를 받치는 물적 토대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가 동남아시아 국가를 악의적으로 묘사하면 해당 지역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반감이 확산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면 현재 한국 콘텐츠가 누리는 동아시아에서의 지배적 위치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제 발등을 찍는 일인데, 도대체 '라켓소년단'은 왜 가만히 있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건드려 평지풍파를 일으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위상이 올라갔으면 위상에 따라오는 무게도 견뎌야 한다. 과거 우리 콘텐츠의 위상이 낮을 때는 마음대로 편하게 만들어도 별문제가 안 생겼다. 그때는 외국에서 한국 콘텐츠를 아예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동아시아에서만큼은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했다. 그렇다면 비록 힘들더라도 다양한 국가 시청자들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짜야 한다.
'라켓소년단' 측은 별 악의 없이, 현지의 텃세에도 불구하고 실력으로 이겨내는 우리 대표선수의 모습을 그리려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현지 국민들도 시청자라는 걸 간과했다. 제작진의 의식수준이 여전히 80년대, 외국에서 우리 콘텐츠를 무시하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이번 드라마 내용을 두고 인도네시아에서 인종차별이란 반응이 나온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이건 그들이 한국을 앞선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다. 동급이라고 생각했으면 '차별'이라는 말을 안 썼을 테니까. 한국을 차별할 수도 있는 앞선 존재로 여긴다면, 한국 콘텐츠의 표현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켓소년단'과 같은 일이 반복되면 한국에 대한 반감에 불을 지르게 될 것이다. 상품 수출이나 관광 산업에도 악영향이 있을 수 있다. 드라마가 한국 이미지를 살릴 수도 망칠 수도 있는 시대다. 한국 콘텐츠 위상에 걸맞은 업계의 의식제고가 요청된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