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못해서…” 어르신은 오늘도 ‘노인稅’ 냈다
서울시 노원구에 사는 김모(65)씨는 지난달 초등학교 4학년 외손자가 어린이날 선물로 사달라던 ‘헬로카봇’ 로봇 장난감을 사기 위해 종로구 창신동의 문구 완구 시장을 찾았다. 가게에 들어가 “제일 비싼 카봇 장난감을 달라”고 하자, 주인은 “정가 10만8000원짜리”라며 최신 장난감 하나를 내밀었다. 제품엔 ‘8만6800원’이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20% 정도 싼 가격에 선뜻 현금을 주고 샀다. 그 얘길 들은 30대 딸은, 왜 비싸게 주고 샀느냐며 환불해오라고 재촉했다. 김씨의 딸은 인터넷 쇼핑몰 최저가를 한 바퀴 훑더니, 쿠팡 앱을 켜서 똑같은 ‘헬로카봇’ 장난감을 6만6430원에 샀다. 김씨는 “내 처지에선 싸게 산다고 도매시장에 가서 현금 주고 샀는데 인터넷을 할 줄 모르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했다.
지난 2일 B패스트푸드점을 찾은 이모(73)씨는 카운터 직원에게 “지금 싸게 파는 햄버거”를 달라고 해, 치즈 햄버거 2개와 콜라 2개를 8600원에 샀다. 이 제품은 B사 앱에선 추가 할인이 적용돼 7200원에 살 수 있다. 10개 사면 버거를 공짜로 주는 스탬프 적립 혜택도 있다. 이씨는 “햄버거가 싸서 여기 자주 오는데 그런 앱이 있는 줄도 몰랐고 쓸 줄도 모른다”고 했다.
디지털 시대, 한국의 노인들은 사실상 ‘노인세(稅)’를 내고 산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인데도, 단지 디지털을 모른다는 이유로 상품을 살 때뿐 아니라 은행 송금, 증명서 발급 등 일상생활 곳곳에서 2~6배가량의 웃돈을 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세계적 디지털 선진국으로 통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2020 디지털 경쟁력 평가'에서 세계 63국 중 8위였다. 스마트폰 보유율은 93.1%로 세계 1위다. 하지만 화려한 숫자 뒤에 노인들은 사실상 소외돼 있다.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이제 디지털은 단순한 여가의 일부가 아닌 생활”이라며 “노인들이 디지털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사회에서 배제됨을 의미한다”고 했다.
디지털을 모르는 노인들이 내는 이른바 ‘노인세’는 일상생활 전반에 적용된다. 디지털을 몰라 은행, 주민센터 등 대면(對面) 창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어김없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민간 기업뿐 아니라 세금으로 운용되는 공공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응대 인력을 최소화하고 업무 처리를 자동화한다는 명분으로 ‘징벌적 비용’을 물리는 것이다.
경조사 부조금 등 일상에서 필수적인 송금을 할 때도 ‘노인세’가 따라 붙는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장모(73)씨는 최근 손주 돌을 맞은 친지에게 100만원을 부치려고 은행 창구를 찾았다. 이 은행 계좌를 30년 넘게 보유한 ‘우량 고객’이지만, 스마트폰 앱이나 ARS(자동 응답 시스템)는 쓸 줄 모른다. 창구 직원은 “수수료가 2000원”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이 카카오톡이나 은행 앱에서 1분도 안 돼 송금을 하고, 수수료도 대부분 우대를 받아 돈을 안 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정낙건(82)씨도 “은행 앱은 내려받을 줄도 모르고, 쓰는 법도 모르니 창구에서 2000~3000원씩 매번 수수료를 낸다”며 “자식한테 부탁은 할 수 있겠지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최근 노년층에게도 열풍인 주식 투자를 할 때도, 스마트폰 앱을 쓸 줄 모르면 2배 이상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실제로 한 증권사에서 1000만원어치 주식을 살 때, 스마트폰 앱으로 사면 수수료가 1만5720원이지만 지점에 직접 갈 경우에는 4만9720원을 내야 한다. 수시로 주가(株價)가 변하는 상황에서 인터넷이나 모바일 앱 사용이 서툴면 적시에 매매하기도 어렵고, 돈도 더 내야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송금, 주식 거래는 물론 예약부터 결제까지 다양한 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각종 할인을 톡톡히 챙긴다. 새 제품뿐 아니라 스마트폰 중고 거래 앱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각종 제품을 구매하고, 소셜미디어에 인증샷을 올리거나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식당 계정을 추가한 뒤 ‘서비스’ 혜택을 받기도 한다.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겐 먼 얘기일 뿐이다. 곽서근(67)씨는 “얼마 전 갔던 양식집에서 직원이 내 폰을 가져가서 카카오톡으로 무언가를 누르더니 ‘다음 방문 때 이 화면을 보여주면 빵을 서비스로 주겠다’고 하더라”며 “몇 번 더 그 가게에 들렀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는지 몰라 결국 서비스는 못 받았다”고 했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구청이나 주민센터 민원 창구에서 공무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를 발급받는 비용은 1000원이다. 하지만 공공 기관 내 무인 민원 창구를 이용하면 절반인 500원이고, 인터넷에서 발급받으면 무료다. 지난 2일 등기부등본을 떼기 위해 서울 노원구청을 방문한 이영화(79)씨는 민원 창구로 갔다가, 직원 도움을 받아 무인 발급기에서 50% 할인을 받아 서류를 뗐다. 그는 “이런 기계에서 나온 게 제대로 된 서류가 맞는지 한참을 읽어봤다”며 “직원들이 한가해서 나 대신 뽑아줬지만 혼자서는 절대 못 한다”고 했다. 김범중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코로나 이후 서비스 이용, 정보 전달이 대부분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패러다임이 더 빨리 바뀌었다”며 “젊은 사람들은 빨리 적응하지만 노인들은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한 구매, 금융 거래 경험이 없다 보니 이에 대한 불신(不信)이 큰 것도 걸림돌이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김모(70)씨는 “어떻게 똑같은 물건인데 인터넷에서 30%씩 깎아주겠느냐”며 “인터넷으로 안 좋은 걸 가져다 팔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거주하는 최모(66)씨도 “인터넷에는 가짜 중국산 제품이 많다고 들어서 옷 살 때는 꼭 의류 매장에 간다”고 했다. 강모(70)씨는 “휴대폰으로 돈을 보내다가 엉뚱한 데로 잘못 보낼 것 같아 꼭 창구로 간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70대 이상 노인들은 ‘보이지 않는 계층’이라 할 정도로 사회적 논의에서 배제돼 있다”며 “그래서 구조적으로 자신이 돈을 더 내면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했다. 그는 “공공 기관부터 먼저 나서서 노인이 생각지 못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요금 체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