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거스른 소녀, 뒤엔 '진보적'인 엄마가 있었다
[리뷰] 영화 ,에놀라 홈즈. 탐정이 된 소녀
이정희(ama2010)
2020.10.13 : 17:0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의 청소년 소설 <사라진 후작>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낸시 스프링어는 '스테디 셀러인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으로 소설을 연다. 여전히 다른 버전으로 각색되어 회자되는 명탐정 셜록 홈즈, 그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셜록 홈즈의 21세기 버전 영국 드라마<셜록>에서는 이미 여동생으로 유로스가 등장한 바 있다. 셜록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 셜록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인 유로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극적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렇다면 원작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여동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에놀라 홈즈 ⓒ 넷플릭스
셜록의 동생, 홀로 엄마를 찾아 떠나다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학자며, 화학자이자,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사격의 명수, 검술사, 권투선수, 명석한 연역적 사상가'로 자신의 오빠 셜록(헨리 카빌 분)을 소개한다.
그런 오빠의 동생 에놀라는 어떨까?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산수도 잘 하'며, '새 둥지도 찾을 수 있고, 지렁이도 파낼 수 있고, 고기도 잡을 수 있고, 자전거도 탈 수'있다고 영화의 초반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에놀라의 정체성은 에놀라가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정체성에 '위배'된다. 여왕 빅토리아가 지배하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는 '신사'라는 남성들이 사회 주도권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정숙하게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바느질로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그 시절 여성들에게 요구된 전부였다. 하지만 에놀라는 이런 예절과 바느질을 배우는 대신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엄마 유도리아로부터 말이다.
그런 정신적 보호자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던 어머니가 에놀라가 16살 되던 생일에 사라졌다. 일찍이 집을 떠났다 돌아온 오빠들은 없어진 엄마를 찾는 한편, 천방지축 에놀라를 '기숙학교'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에놀라는 오빠들의 그런 결정에 반해 '스스로'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사라진 엄마, 사라진 후작
▲ 에놀라 홈즈 ⓒ 넷플릭스
영화의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중 등장하는 참정권 운동이다. 영화에서 에놀라가 읽었다던 울스턴크래프트의 책이 그것인데, 1792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책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여성의 인권과 운동을 주장했다. 이 책은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참정권 운동의 역사는 '여성 해방 운동'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된다. 1865년 런던에서 여성 참정권 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1967년 제출된 선거법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 부결은 외려 전국 각지에서 참정권 위원회를 발족시키는 계기가 된다.
동등한 인간임에도 왜 여성들의 권리는 외면당했을까. 대부분 가정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남편이 아내의 재산을 통제할 권리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번번이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주장은 의회에서 거부됐다.
자신들의 권리가 거부되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려 했다. 영화 속 에놀라가 찾아간 창고에서 등장한 '다이너마이트' 등이 그런 여성들의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드러낸다.
하나뿐인 딸 에놀라에게 당당하고 주체적인 교육을 시켰던 어머니 유도리아는 어떤 회합을 계기로 에놀라를 홀로 남겨둔 채 집을 떠났다. 후에 다시 만난 어머니는 외려 그게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토로한다.
'실종'이라는 극단적 설정은 여성 참정권 운동이 격화되어가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놔둔 채 집을 떠나야 했던 어머니의 '결단'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며 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서사를 확대한다.
그리고 이런 엄마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에놀라가 개입한 후작의 실종 사건의 실체와 맞물리면서 서로 다른 길을 달렸던 열차의 궤도가 하나로 만나듯 합쳐진다.
▲ 에놀라 홈즈 ⓒ 넷플릭스
결국 에놀라는 탐정 데뷔전을 통해 튜크스베리 후작 실종 사건을 해결함은 물론, 사라질 뻔한 튜크스베리가 당당하게 의회에 입성해 한 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여성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워준다. '자전거도 잘 탈 수 있다'고 말하던 시골 소녀 에놀라는 사라진 후작 사건을 통해 당당하게 런던에서 탐정으로 자신의 삶을 열게 된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엄마가 있었기에, 탐정 에놀라가 있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에놀라 홈즈'를 보고 자란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탐정'은 고전의 '셜록'이 아닌 '에놀라'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탐정 에놀라는 그 미래의 선택지를 또 다르게 열어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