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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소식역사가 결코 우리를 파괴할 수는 없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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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숲속의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신고 회원메모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4.08 08:02 39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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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역사가 결코 우리를 파괴할 수는 없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애플tv플러스 제공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애플tv플러스 제공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문학사상의 한국어판 <파친코>에는 이 문장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낙제했을 때 쓰는 단어인 페일(fail)이 망치다로 번역된 것이다. 전문가가 번역을 했으니 틀림없겠지만 어쩐지 거꾸로 번역을 한다면 망치다라는 표현에 루인(ruin)이 먼저 떠오른다. ‘루인’은 짓밟는 폭력을 연상시킨다. 실패, 낙담을 떠오르게 하는 단어 페일(fail)의 폭, 어쩌면 소설 <파친코>의 힘은 바로 이 진폭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애플tv플러스가 제작한 드라마 <파친코>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대중적 인기를 먼저 끌고 평단과 언론이 맥락 분석으로 따라갔다면 <파친코>의 양상은 다르다. 엘리트 집단에 가까운 평단과 언론이 먼저 움직였고, 으레 서로 엇갈리던 대중의 평가도 일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2022년 드라마 <파친코>는 2017년에 출간된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재현 양상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편년체 방식인 원작과 달리 드라마는 1910년대와 1980년대를 숨가쁘게 오간다. 차이는 번역 과정에도 있다. 원작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고향, 2부는 조국, 그리고 3부는 파친코이다.

흥미로운 것은 2부의 제목이 <조국>이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주로 일본 오사카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선자를 따라 드라마에 초대받았지만 사실상 한국은 선자의 고향일 뿐 선자가 낳게 될 아이들의 고향, 태어난 곳은 일본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과연 조국은 태어난 곳일까 아니면 핏줄의 연원일까? 이미 제목 자체가 문제적이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은 매우 건조하고 때론 냉정하다. 특히 죽음의 처리에 있어서 그렇다. 아직 드라마상에 등장하지 않은 몇몇 죽음이 있다. 사건 혹은 사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죽음을 이민진 작가는 묘사하지 않고 진술한다. 누가 죽었다라고 혹은 누가 죽은 후에라며 아예 죽음의 장면화를 건너뛴다. 대신 생존의 순간들이 길게 묘사된다. 살기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가에 관한 끈질긴 서술이다. <파친코>의 가장 놀라운 점은 건조하고 냉정한 소설의 문체를 버리지 않으면서 어마어마한 감정적 이입과 감동의 파고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지점들이 대개 각색과정에서 첨가된, 새로운 에피소드라는 점이다. 일본 순사에게 잡혀 무릎을 꿇게 되는 어부, 현해탄을 건너던 배 속에서의 멀미, 춘향가의 한 소절을 부르다가 끝내 절망적 선택을 하는 소프라노의 이야기는 원작 소설엔 없다.

1920년대의 부산 영도와 1932년 여객선 속의 풍경은 공부와 고증을 거치며 그 어떤 역사적 발언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연결의 매듭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게 1932년의 여객선과 1989년의 도쿄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간격 속을 살아남은 한 여인의 얼굴이 세월 속 다른 모습으로 교차된다.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대인의 잔혹사는 대중 예술인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제작되고 각인되어 왔다.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유대인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주류가 된 이후 숙명처럼 그 가혹한 역사를 증언했다. 영화만큼 강력한 공감의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친코>의 사례는 다르다. 오히려 새로운 플랫폼들의 출연 속에서 경쟁력 있는 이야기를 찾던 중에 흡입력 강한 이야기로 한국의 역사가 재발견되었다. 언제나 국내용 이야기로 여겨졌던 한국의 근대사가 가족과 생존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경신한 블루오션으로 주목받았다. 이는 소설, 드라마 <파친코>로 구체화된 우리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시즌 4까지 기획 중인 드라마의 여정을 보자면 현재는 고작 시작이다. 드라마 스태프는 한국의 격동기와 재일일본인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탄탄한 역사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진실은 정교하게 왜곡된 기록보다 솔직한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더 투명하게 담긴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뤄진 4대의 삶 속에 그토록 외면하려 했던 역사적 진실이 고스란히 비치는 것이다. 허구적 인물, 선자는 세상에 없지만 한편 선자는 모든 한국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감추고 꾸미려 해도 역사의 진실은 개인의 삶에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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